Architectural  Design   / Urban Design   / Interior Planning   / Landscape Design   / Renovation

 

“그래서, 21세기는 왔는가?”

 

 

 

[에피소드 1] 메트로폴리스와 타워팰리스

  1895년, 영국의 H. G. 웰스는 ‘타임머신’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다. 이후 타임머신이라는 단어는 고유명사가 되었고, 우리는 시간여행, 즉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나 과거로 여행하는 환상을 구체적으로 가지게 되었다. 미지의 시간으로 간다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매혹적이었고, 상대성 이론과 같은 새로운 과학기술의 발견은 이러한 미래에 대한 관심에 현실감을 부여하여서, 20세기의 과정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과 탐험의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20세기는 과거에 대한 부정과 새로운 사회,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모색의 시대여서, 이러한 시대정신은 사회와 예술,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의 각 분야에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새로운 미래에 대한 갈망을 가장 잘 드러난 것 중 하나는 공상과학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천몇년 모 국가의 한 도시...”로 시작되는 이러한 영화들의 환상적인 볼거리는 우리에게 피곤하고 지친 일상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위안을 주었으며, 다가올 새로운 21세기에 대한 판타지를 심어주었다. 새로운 세기 또는 새로운 천년에 인간은 노동을 하지 않고, 우주를 넘나들며, 로봇이 우리와 대화를 한다거나, 인조인간이나 컴퓨터가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식의 줄거리를 보고 극장을 나섰던 사람이라면 21세기에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와 많이 달라지기를 기대했을 것이며, 이 기대의 상당부분은 낙관적인 전망이 섞여있었을 것이다. 그런 영화의 대부분은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말도 많고 기대도 많던 세기말이 지나고 몇 년이 안 된 지금, 몇십년 전 그렇게 환상적으로 때로는 절망적으로 표현되었던 21세기의 미래가 되어버린 지금, 현실은 그렇게 판타스틱 하지 않으며, 심지어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21세기가 되면 해결되리라 막연히 기대하였던 20세기의 갈등은 여전하며 오히려 새로운 세기의 발전에 짐을 지우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소외와 차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낡은 사고방식과 정치는 새로운 사회구조를 생산하는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21세기가 된 도시의 물리적 환경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고층의 화려한 빌딩들이 우리의 도시공간에 들어서기는 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도시공간에서의 불평등한 부의 분배와 관련되어 있다. 우뚝 솟은 성채와 같은 타워팰리스의 양재천 건너편에는 포이동의 집단 철거민 지역이 자리하고 있고 이는 현재 우리사회가 갖고 있는 계급적 차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부동산투기와 같은 비생산적인 경제과정을 통해 출현한 한쪽의 고소득 ‘보보스족’과 그 대칭점에서 희생되고 있는 신빈곤층으로의 분열은 우리사회가 가진 가능성에 의문을 갖게한다.

  이는 1927년 Fritz Lang이 만든 영화 “Metropolis"와 놀랍도록 유사하다. 2026년 미래는 땅위의 화려한 고층에 사는 계획가 계급과 지하의 어두운 작업장에서 열악하게 사는 노동자 계급으로 극단적으로 분열된다. 이 영화에서처럼 이 높은 신바벨탑은 공격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해결될 수 있는 갈등인가?

 

 

그림 1) 영화 메트로폴리스의
            Gothic Skyscraper, 1927

그림 2) 타워팰리스, 2004

 

 

[에피소드 2] 빛나는 도시와 아파트

  20세기의 건축은 영웅적인 시기였다. 20세기 벽두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이 모색되던 시기에 당시의 예술가, 건축가들은 과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예술, 새로운 건축을 모색하였으며, 그들의 제안이 사람들의 삶에 직접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를 바랐다.

  1922년 프랑스의 건축가 르 코르뷔제는 "빛나는 도시를 제안했다. 인구 300만의 이 "도시"는 빼곡히 들어찬 저층의 단독주택 대신 건물의 층수를 높여 오픈된 대지를 많이 확보함으로써 주변녹지등을 폭넓게 확보해 "빛나는 공동체"를 이루겠다는 뜻에서였다. 신개념의 주거공간, "아파트"는 그렇게 제안됐다.

  유럽에서 노동자를 위한 공공의 주택으로서 역할을 하던 이 아파트는 현재 한국에서 지배적인 주거형태가 되었다. 양적성장과 개발지상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70년대 이후, 이 땅에서 아파트는 내 집 마련의 꿈임과 동시에 중산층 이상에게는 손쉬운 재테크의 수단이 되어왔다. 이 대표적인 주거방식은 우리의 주거난을 해결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고, 우리나라의 신도시의 이미지는 마치 코르뷔제의 꿈이 한국에서 실현된 듯해 보인다. 실제로 외국의 건축가들은 이러한 신도시의 모습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이 없는 도시계획과 이윤의 극대화에 봉사하는 부동산정책의 결과로 르 코르뷔제가 꿈꾸었던 빛나는 도시는 초고층 건물의 이미지로만 전락한 듯 하다. 교통체증을 아랑곳하지 않는 초고밀도 개발로 도시는 녹지가 없는 콘크리트 건물 밀림지대가 되어, 서울을 관통하는 한강변은 아파트 장벽에 가로막혀 있으며, 서울의 높고 낮은 산등성이 위에 거대한 회색 콘크리트 더미가 깔아뭉개고 올라타 있다. 차량배기가스에 의한 대기오염과 자원의 낭비로 우리의 미래 환경은 위협받고 있으며, 거대한 장벽처럼 존재하는 경제적 풍요 계층과 못 가진 자와의 사회적 차별과 도시공간에서의 분리는 우리 도시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태롭게 한다.

 

그림 3) Le Corbusier의

          빛나는도시 계획안,

          1922

 

그림 4) 신도시의 한 아파트, 2004,

코르뷔제의 꿈은 실현되었는가?

 

 

  르 코르뷔제가 꿈꾸었던 빛나는 도시는 단지 고층건물들의 군락이 있는 이미지로서 제안되거나 부동산 개발의 효율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녹지, 교통, 환기, 전망, 밀도, 생산 등 우리의 삶과 직접 관련 맺고자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도시는 빛나는 도시가 될 수 있을 것인가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고 싶다.

 


[에피소드 3] 세계무역센터

  2001년 9월 11일, 꿈과 희망의 새로운 세기는 여지없이 박살났다. 이 엄청난 이벤트는 21세기가, 새로운 천년이 과거를 완전히 단절하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는 헛된 망상으로부터 우리를 확실히 깨어나게 했음은 물론, 이 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또한 향후 새로운 백년이 그리 낙관적이지 못할 것임을 인식시켰다. 20세기가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상황에서 출발하였다면, 21세기는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굴레와 유산을 뒤치다꺼리하면서 시작하여야할 운명에 처해있는지 모른다.

  이 세기의 첫 역사를 장식한 이 세계무역센터는 20세기 초반부터 시도되었던 일련의 초고층건물들 중 가장 기념비적인 건물로서 20세기 미국 자본주의의 표상임과 동시에 건설기술의 대표주자였다.

 

  미국의 맨하튼남부개발공사는 올초 9.11테러로 붕괴한 이 무역센터 터의 재건축 계획을 발표하였다. 미국과 유럽, 일본의 건축가들로 구성된 7개 설계팀은 417m였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은 물론 현재 세계 최고 건물인 말레이시아의 페트로나스 쌍둥이 빌딩(445m)보다 더 높은 빌딩의 건축을 제안했다. 이 중 당선작으로 선정된 미국의 다니얼 리베스킨드의 계획안은  세계 각국의 식물들을 층별로 배치한`수직세계 식물원'을 높이 541m에 이르는 건물에 설치하고 2만4천㎡의 추모공원을 조성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림 5) 새로 지어질 세계무역센터의

           계획안

그림 6) 9.11테러를 보도한

           미국의 지역신문

 

  단정한 매스, 직선적 입면, 커튼월, 균질한 평면의 20세기 건축의 경향을 대표하던 이 세계무역센터는 이제 곧 해체주의 스타일의 작가에 의해 최신 경향의 형태로 재건립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형태와 공간, 최첨단의 기술이 집적될 이 건물이 과연 과거의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세기의 시대정신으로 다시 자리 잡게 될 수 있을까?


 

 

[에필로그] 20세기를 추모하며   


  시간은 벌써 2004년이 되었지만, 아직 우리에게 21세기는 오지 않은 듯하다. 아직 새로운 천년은 시작되지 않은 듯 하다. 떠들썩하던 세기말의 꿈과 설레임은 어느덧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불합리와 부조리, 차별과 빈곤은 계속되고 있으며, 전쟁과 죄없는 죽음은 계속되고 있다. 예술은 궁핍하며, 도시와 환경과 우리의 삶은 여전히 열악하다.

 

  식민지에 봉사하거나 그 그늘 아래서 성장한 지식인들이 여전히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고자 하고 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을 개발독재로 몰아넣었던 새마을 운동은 뉴타운이라는 동명동의어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600여년 서울의 삶을 묵묵히 담아냈던 청계천은 쾌적한 도시이미지라는 미명에서 우리 도시의 삶과 생산, 역사를 무시하고 있다. 우리의 인권과 생각의 자유를 억압하였던 독재자와 그 세력들이 개발과 경제성장이라는 미명하에 부활하고 있다.

 

 

그림 7)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에 관한 서술. 본격적인 국토파괴의 시작?

                                   

  그러나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과거의 부활과 반복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꿈과 희망, 도전이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 너무 쉽게 잊혀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 바로 그렇게 때문에 과거에 대한 향수와 그 굴레가 우리 미래의 발목을 너무 강하게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다시 한번 새로운 세기를 시작하던 2000년 또는 2001년 1월의 마음으로 돌아가 우리의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꿈꾸기를 희망한다.

  새로운 세기,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에 대한 주체적 열망과 도전으로 역동적이던 20세기 초반의 사회, 과학, 예술, 건축,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 일지 모른다. 20세기는 우리에게 짐과 굴레임과 동시에 희망이다.

 

 

 

 

© copyrights 1999 - 2011 A.rum.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