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tectural  Design   / Urban Design   / Interior Planning   / Landscape Design   / Renovation


 

우리의 도시는 누가 만드는가?

골목길, 좁고 큰 세계

적어도 우리 세대는 어린시절 골목길의 추억이 있다. 해가 떨어져서 잘 분간이 안 되더라도 공놀이 하느라, 놀이를 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동네 아줌마, 아저씨에게 꾸지람을 들을 때까지 노느라, 추운 겨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과 뺨이 부르트도록 노느라 어린 시절을 보낸 기억이 우리 또래들이라면 대부분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동네의 골목길은 공동체가 만나는 공간이었다. 공터, 나무, 담, 그 너머 얼핏 보이는 집들의 어우러짐, 전봇대와 가로등, 밤이라면 살짝 걸쳐 있는 눈썹달, 작은 놀이터에 아이들이 놀고 있고, 아름드리나무의 그늘에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고,... 이렇게 우리 동네를 구성하는 것들과 그 풍경은 골목길 안에서 일어나거나 골목길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렇게 연결된 동네의 비워지고 버려진 공간들은 우리의 주요 활동무대였고, 우리는 그 공간의 프로그램을 결정하고 조정하는 건축가였다. 우리는 그 속에서 세계를 배웠다.

그러나 지금의 아이들은 우리의 어린 시절과 많이 다르다. 골목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흙놀이를 할 수 없게 되었고, 비워진 공간마다 자동차들로 채워져 있어 오히려 지나다니기에도 위험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어린이 놀이터라는 곳은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뻔한 놀이기구로 채워져 있어 요즘의 아이들은 게임기와 컴퓨터에 푹 빠져 가상의 공간에서 가상의 놀이를 하며 가상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친구들을 만난다.

기존의 도시공동체의 최소단위였던 골목길은 이제 없어진 듯하다. 거기에 덧붙여 인터넷으로 연결된 가상의 공간은 거리(distance)와 크기의 개념을 소멸시키거나 변화시켰고, 공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은 지리의 개념보다 시간적 개념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도시를 둘러싼 변화

이러한 골목길과 같은 공동체 시스템의 붕괴 또는 변화는 우리의 삶의 방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 대한 정보는 넓고 다양해졌지만 우리의 일상은 개인화되고 고독하다.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관심이 없으며, 우리는 일과를 마친 후 각자의 집으로 몸을 숨기기에 바쁘다. 일상이 반영되지 않는 만남은 우리의 삶의 방식과 관련을 맺기 힘들다.

지난 세기, 개발과 경제성장의 절대명제는 도시의 양적, 질적 성장과 도시매력의 향상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할 수는 없다. 지난 세기, 우리의 도시환경은 중앙집권의 정부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특정의 전문가 집단이 규제와 강제를 통해서 집행하였고, 실제 그 공간에서 생활하는 우리는 의사결정에서 소외된 단순한 수혜자였다. 도시는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과정에서 변화되었다기보다는 부동산 자본과 개발논리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우리의 도시는 서서히 조금씩 변화하고 있고 변화하여야 한다. 이제 우리의 삶의 환경에 대한 자각과 욕구는 점점 강해지고 있다.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의지는 도시를 둘러싼 패러다임을 변화시키고 있다.


마을가꾸기, 즐거운 참여와 놀이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들은 도시 공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다. 자기 집 담장을 허무는 것부터 쓰레기 분리수거와 관련된 주민 협의, 차 없는 거리를 만들기 위한 노력, 상점가를 활성화시키려는 노력, 안전한 등굣길을 만들려는 노력, 버려지고 무관심 속에 방치된 장소를 새롭게 의미를 갖는 공간으로 꾸미는 것, 심지어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는 것까지 우리의 삶의 환경을 가꾸려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시도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기존에 정부가 결정한 내용을 수동적으로 수용하거나 반대의 의사표시 정도로만 그쳤던 주민들의 태도는 이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정, 보완 등을 하는 주체적 역할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마을가꾸기는 주민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지의 과정이다. 살기 좋은 마을이라는 것은 겉보기 번듯한 마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살기 좋은 마을, 도시는 단지 물리적 환경의 척도만으로 평가될 수는 없을 것이며, 자신의 삶의 가치를 존중받고,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쾌적한, 그리고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곳일 것이다. 즉, 살기 좋은 곳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와 환경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살기 좋은 곳을 만드는 것은 물리적 환경의 개선의 문제보다는 공동체 복원의 문제에 가깝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와 환경으로부터의 소외의 극복은 스스로의 주체적 참여를 통해 구현될 수 있다. 이러한 참여는 의무나 강압이 아니라 놀이이자 창조적 행위가 될 수 있다. 자기가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자기의 의지가 주변 환경에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과정이다.

이 모든 과정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골목길을 개선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첫 출발은 결국 관계되는 주변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결국 이는 공동체 복원의 첫 단추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도시의 자생력을 회복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노력으로 발전되어 나갈 것이다.

이제 우리의 도시에서 필요한 것은 만들어진 옷에 내 몸을 맞춰야 하는 기성복과 같은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안성맞춤인 맞춤복이 되어야 한다. 이제 도시는 전문가가 주민들을 위해 결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림 1) 한여름 농사일을 하다 쉬는 시간이 좀 더

쾌적해 질 수 있기를 기대하며 어느 마을의 정자

주변을 하천의 자갈을 이용해 통로와 영역을 만들어

주었다.

그림 2,3,4 일본 센다이시의 중심가로인 조젠지도리. 50년 전에 심은 가로수가 이제는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중심녹지축이 되었다.

 

 

다리(橋)

드디어 청계천 복원 사업이 완수되었다. 시민들은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청계천의 화창한 가을 하늘을 만끽하고 있다. 주말이면 그저 집안에서 뒹구는 것이 취미이자 특기인 나는 텔레비전을 통해 청계천에 몰려든 그 엄청난 인파를 보면서, 일부러 그 장날처럼 북적거리는 곳에서 부대끼고 있는 그 극성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우리가 여유와 휴식을 위한 장소에 참 목말라하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로 청계천 복원은 불도저식 추진과정에서의 문화재 보존 및 재생의 문제, 마른 하천에 한강물을 억지로 끌어와 흘려보내는 비용과 에너지의 문제, 폭이 좁은 인도와 그 가운데 심어진 가로수로 인한 보행권 보장 등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우리의 도시공간에서 그동안 숨통을 억죄던 장애물 하나를 걷어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라고 할만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복원이 완성된 후의 청계천을 걸어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청계천에서 또 하나의 불만이 있다. 그것은 공사가 진행될 때 청계천변을 지나면서 언 듯 보이는 모습 중에, 그리고 서울시가 청계천을 홍보하기 위한 투시도들 속에서 봤던 것이다. 그것은 다리, 특히 보행전용 다리이다.

사람들마다 미적 판단의 기준이 다르겠지만, 그것들은 왠지 내 눈에는 거북해 보였다. 내게 그것들은 너무 멋지게 보이고 싶어 과장하고 치장하다 보니 뭔가 어색해 보이고 가짜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단추나 주머니가 더 달렸다고, 장식이 더 붙었다고 좋은 옷이 아닌 것처럼 맥락이나 구조적 필요성과는 관련 없이 부가적으로 덧붙여지고 과장된 다리는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어떤 다리는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의 다리와 얼핏 유사하기 까지 하고(유사하다는 것이 곧 아름다움도 유사함을 뜻하지 않는다.), 어떤 다리는 전통의 문양을 유치하게 차용하기에 급급하다.

사실 우리는 보행자 전용 다리 또는 인도교 (foot bridge)에 익숙하지 않다. 사실 우리가 본격적으로 다리를 짓기 시작한 시기가 산업화의 시기였고, 이 시기에 지어진 다리는 거의 자동차를 위한 다리였기 때문이다. 또한 작은 하천들은 예전의 청계천처럼 복개하여 위로는 자동차를 위한 도로로, 밑으로는 도시의 오폐수를 내버리는 하수도로 만들기 바빴기 때문이다. 걷거나 자동차로 지나는 길이라서 땅위의 도로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하천을 복개한 곳이 의외로 많다. 심지어는 역사가 오래된 기존의 멀쩡한 다리들조차 부셔버리거나 전혀 제 역할을 못할 곳으로 옮겨버리기조차 하였다.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의 발자국에 닳아 거칠고 울퉁불퉁해지면서 넉넉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지켜주는 훌륭한 다리를 갖고 있지 못한다.

실제로 우리는 이러한 다리의 디자인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다. 실제로 내가 서울에서 기억하는 육교를 제외한 보행전용 다리는 선유도 공원을 연결하는 다리밖에 없다. 그것도 실제로 생긴지 몇 년 안 된 다리이다. 그러다 보니 청계천에 놓이게 될 새로운 다리들을 세우기 위한 재료나 주제가 궁색하였을 수도 있다. 더구나 급하게 추진하였어야 하는 사업이었기에 충분히 검토하고 판단할 여유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한번 지어지면 오랜 시간동안 우리의 도시공간을 점유하고 우리의 경험과 함께 할 중요한 구조물들이 날림으로 디자인되고 지어지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이태리 피렌체의 폰떼 베끼오라는 다리는 보행자를 위한 다리이자 상가와 주택이 복합되어 700년 가까이 피렌체의 명물로 자리하고 있다. 리알토 다리에서는 베니스의 향취를 한껏 누리는 경험이 제공된다. 퐁네프의 연인의 애절한 사랑은 파리의 가장 오래된 다리 중 하나인 퐁네프라는 다리와 세느강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우리의 북촌과 남촌을 잇던 수표교는 아직도 청계천으로 복원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장충단 공원에 남아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다리는 우리의 공간과 장소를 연결하는 네트워크이다. 거기에 다리는 더 나아가 우리의 삶을 연결하고 우리의 역사를 연결한다. 거기서 우리는 지나치고, 소통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추억을 남기고, 또 다른 공간, 시간, 삶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더구나 자동차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다리와 달리 우리가 직접 발자국을 남기는 다리는 더욱 우리의 일상과 가까이 있다. 또한 우리의 도시는 나무의 나이테처럼 시간의 흔적들을 그대로 간직한다. 건물뿐만 아니라 가로등, 안내 표지판, 벤치, 우체통,... 등, 도시 공간 곳곳에 깃든 작은 물건, 작은 풍경 하나도 우리의 흔적이다. 눈길에 남겨질 발자국도 뒷사람을 위해서 조심히 밟았던 우리의 선조를 생각할 때 도시 공간에 작은 구조물 하나도 섣부르게 해서는 안 된다.

청계천 복원이 지난 개발독재가 남긴 유산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그 위에 지어진 다리를 볼 때 우리는 다시 70, 80년대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마 조만간 청계천의 이 짝퉁(?) 다리들을 위해 다시 비용을 지불하여야 할 것 같다

 피엔체의 Ponte Vecchio, 주(住)상(商)교(橋) 복합

청계천의 다리들

 

스페인의 건축가 calatrava의 다리들

 

 

일류 디자인의 시대

이제 드디어 대한민국에 디자인의 시대가 옵니다! 무조건 올 수 밖에 없습니다.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요? 갑자기 이제 와서 디자인의 시대라니, 생뚱맞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디자인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옛날부터 있어왔고, 그 중요성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알만큼 알고 있는데 왜 고리타분하게 다시 디자인이야기를 꺼낸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컨대 이제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디자인의 시대로 접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고요? 우리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모 재벌그룹의 회장님과 임원들께서 지난 4월, 이탈리아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 밀라노 디자인 전략을 채택하고 디자인 역량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추진계획을 발표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당연히 최고이고 세계 일류와 경쟁하는 그 그룹이 스스로의 디자인을 1.5류라고 인정하고(2류,3류는 알겠는데 1.5류는 처음 들어봅니다) 향후 그룹의 모든 계열사가 디자인을 경영의 핵심으로 할 것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너무 단순무식한(?) 결론이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짧은 생각은 그 그룹이 그렇게 간다면 이제 대한민국도 디자인의 가치가 중요한 시대로 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바로 그 일류 디자인으로 둘러싸인 환경에 무임승차하여 생활할 수 있게 될까요? 글쎄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감히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초일류 디자인의 휴대폰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우리의 생활을 둘러싼 많은 부분들은 디자인 불모의 환경에 처해있습니다.

일단 거리를 걸어볼까요? 무질서를 넘어서 공해에 이를 지경인 간판 숲 아래로, 국적불명의 이상한 디자인의 가로등 불빛 아래로, 날림으로 시공된 보도블럭으로 된 인도위에, 색상과 형태 모두 도시의 맥락과는 전혀 관계없이 자리한 가판대 사이로,.... 우리는 모험하듯이 걷다가,...더운 여름날 무더위의 햇빛과 버스의 배연가스에 대해 전혀 배려하지 않은 버스중앙차로의 승하차장에서 땀을 뻘뻘 흘리다가, 시각적으로 불친절한 버스안내판을 겨우 보고,  유치찬란한 텔레토비 색상의 버스에,...우리는 올라탑니다. 한숨 좀 돌리려고 뿌연 하늘 사이로 바라본 풍경은 오직 남향만을 향해서만 줄지어 서있는 획일적인 아파트뿐입니다.

이제 겨우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의 집은 00동 00호, 입구 한 켜에 자리한 편지함을 확인하자마자 올라탄 엘리베이터는 나만의 공간으로 바로 운반해 줍니다. 물론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위층과 아래층은 가보지도 않았고 사는 사람이 누군지도 잘 모르지만 우리 집과 똑같은 구조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걷던 길들은 자동차에 점령당해 한참 뛰어놀 우리 아이들은 컴퓨터안의 가상공간을 놀이터로 삼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돌아왔는데도 컴퓨터에만 열중하네요. 모 그룹에서 만든 멋진 텔레비전을 켜고, 천박한 대사와 오버액션으로 가득한 채널들을 돌리며 시간을 보냅니다. 이제 졸리면 가구가 아닌 과학의 침대에서 꿈을 청합니다.

디자인은 비즈니스의 세계에서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디자인의 본질은 우리의 생활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은 디자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구, 전등, 칫솔, 포크, 연필, 종이봉투 등과 같은 생활용품은 물론 식당에서의 식사, 백화점의 매장과 진열방식, 복합영화관에서의 영화관람, 병원에서의 진료 등의 우리의 활동 공간까지, 그리고 나아가 우리의 삶을 담고 있는 도시 전체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이 우리의 생활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디자인은 물질적인 것만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생활자체가 디자인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군가와 식사약속을 하게 된다면, 식사의 종류의 선택으로부터(한,중,일,양식..), 식당위치를 선택하고(호텔,압구정동,신촌..), 입을 옷을 정하고(정장,캐주얼,...), 식당에 도착하여 자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 정하고(금연석으로 할 것인지, 중앙에 앉을 것인지, 창가에 앉을 것인지..) 메뉴를 정하고(코스요리, 단품요리,...), 마실 것을 정하고(술,와인,음료,소주...),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그리고 마지막으로 카드로 계산할 것인지, 현금으로 할 것인지,...이는 계속적인 선택의 과정이고 줄곧 계속되는 디자인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식사의 전체 과정은 식당 곳곳의 공간과 시스템에 깊숙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당신이 준비한 선택에 상대방이 만족해한다면 당신의 정성스런 디자인은 성공한 것이고, 불만스러워한다면 당신과 이른바 코드가 맞지 않았거나 당신의 디자인이 뭔가 부족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계속되는 생활 속에서의 선택이 디자인의 출발이며 사물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우리의 생활에 대한 발견과 개선의지의 표현이 바로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디자인은 관심과 배려의 다른 표현입니다. 당장에 내가 쓰고 있는 작은 물건, 나를 둘러싼 주변과 도시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개선하고자, 아름답게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이미 당신은 디자이너입니다. 당신이 만들고 있는, 팔고 있는, 서비스하고 있는 것과 그 과정에 대해 정성을 쏟고, 관심을 갖고,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바로 당신이 디자이너입니다.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함께하고 있는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디자인입니다.

회장님이 꿈꾸시는 일류 디자인에게도 응원을 보내지만, 진정한 일류 디자인은 우리의 작은 디자인 하나하나가 우리의 환경과 삶을 아름답게 가꿔나갈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단언컨대,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이제 일류디자인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간판으로 도배된 건물- 우리나라만의 독창적 풍경(?)

밀라노가구박람회- 침대는 과학이 아니라 디자인입니다.

 

유니버설 디자인 (UNIVERSAL DESIGN)의 시대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테이블은 4각형의 판과 4개의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테이블들은 우리가 그동안 가장 익숙해진 것이겠지만, 아주 가끔 본의 아니게 테이블의 모서리에 앉게 되는 경우에는 테이블의 다리와 앉는 사람의 다리가 서로 거치적거리거나 날카로운 모서리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가끔 그럴 때 이 불편한 책상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은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또는 다리가 3개만 이었으면 하고 생각하기도 했을 것이다. 실제로 테이블은 꼭 4각형이어야 하고, 다리가 꼭 4개라고 하는 법칙은 없다. 원형 테이블도 많으며, 이 경우 다리가 3개뿐인 경우도 많다. 모서리를 모따기하거나 테이블의 한쪽 또는 두변이 아예 원형으로 만들어진 것들도 많다.  

이른바 디자인을 한다는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에 관습이나 고정관념을 벗어나 다른 관점과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을 디자인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게 된다. 실제로 디자인(DE+SIGN)이라는 단어는 기존의 고정된 기호나 표식(SIGN)을 해체(DE)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가 테이블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면 만일 다리가 하나뿐인 테이블이라면 어떨까를 고민할 것이고, 반대로 다리가 5개, 6개, 더 나아가 20개 달린 테이블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처럼 디자인은 사물과 사람의 행동방식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점에서 출발한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부르는 디자인이라는 것이 바로 요즘 뜨고 있는 ‘유니버설 디자인(Universal Design)’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획일적이고 대량 생산된 물건에 자신을 맞추기 않고, 내가 원하고 내가 쓰기에 편한 물건을 디자인하는 것이 유니버설 디자인이다. 내가 왼손잡이라면 왼손잡이용 마우스나 가위가 있다면 당연히 구매할 것이다. 내가 카메라에서 MP3까지 최첨단의 기능을 가지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부모님께 이런 기능의 핸드폰을 선물한다면 아마 매우 부담스러워 하실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부모님은 걸고 받는 전화본연의 기능에 충실하시고, 문자 메세지를 주고받는 것은 그나마 세련된(?) 분들이기에 가능하다. 이런 분들에게는 최소한의 기능만을 가진 핸드폰이 오히려 유용하다.

이제 유니버설 디자인의 시대가 오고 있다. 예전의 디자인과 그로부터 생산된 물건들이 획일적이고 규정된 생활방식과 틀을 강요하는 것들이었다면, 이제 디자인은 다양한 생활방식과 기호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배려로부터 출발한다. 예전에는 상품기획이 불특정 다수를 위한 대량생산의 목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제는 세대연령별, 직업별, 성별로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상품을 기획하고 생산하는 시대가 되었다. 한 경제연구소는 미래시장을 주도할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중 하나로 유니버설 디자인을 제안하였고, 유니버설 디자인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는가 하면, 건설회사의 아파트 광고에도 거주자에 대한 배려를 내세워 유니버설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동원한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사람들마다의 다름을 수용하는 디자인이다. 키가 크거나 작고,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늙거나 어리거나, 뚱뚱하거나 마르거나,...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 같은 구성원이다. 이른바 장애라고 하는 것도 라이프스타일이 조금 다른 것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걸어서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자전거로 움직이고, 어떤 사람은 휠체어로 움직이다. 유니버설 디자인은 바로 그 다름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내가 건물을 디자인 할 때 사용자가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계단과 문턱, 손잡이, 부엌과 목욕탕에 그 사용자의 생활과 행동을 담아내기 위해 고민하게 될 것이다. 결국 내가 하는 작업의 출발은 건물이라는 껍데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과 삶에 대한 고려이다. 이렇듯 유니버설 디자인은, 아니 결국 디자인은 사람들의 다양한 삶 자체에 대한 치우침 없는 애정이다.

우리나라는 앞으로 2020년이면 고령화 사회, 2050년이면 초고령화 사회가 된다고 한다. 아마 우리의 대부분은 이 고령화 사회의 구성원이 될 것이다. 이제는 노인을 위한 상품, 의료, 사회 복지 서비스 등에 대한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도 이러한 ‘시니어 비즈니스’에 대한 전망을 내어놓고 있고 새로운 산업의 한 분야로 떠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고령자를 위한 상품 속에 유니버설 디자인의 제품이 일반화 될 것은 당연하다. 이제 유니버설 디자인의 시대이다. 이를 위해 투자하고 준비하여야 할 때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4개의 다리와 등받이를 가진 의자가 항상 편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전혀 낯선 형태의 의자가 오히려 몸에 편할 수도 있다.

자전거도 앉아서 탈 수 있다. 휠체어나 자전거나 결국 같은 이동수단이다.

일본의 한 기업의 유니버설 디자인 홍보관. 왼손잡이용 주방기구, 큰 숫자판의 전화기 등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이 수용된 생활용품들을 볼 수 있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올내릴 수 있는 자동차. 몸이 불편할수록 자동차가 더 필요하다.

 

 

 

집짓기


6, 7년전의 일이다. 그 늦여름에 경험하였던 소중한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인생 최초로 짧은 기간이나마 백수의 시간을 갖던 나는 전라남도 승주군 송광사의 부속 암자인 불일암에 갔다. 송광사로 부터 20여분의 산길을 걸어 불일암에 올라가는 동안 속세의 모진 세파에 찌든 마음이 점차 상쾌해지는 것 같았다. 그 곳도 역시 후덥지근한 날씨였지만 깔끔하고 운치있게 자리잡은 암자의 풍경과 시원한 물 한 모금으로 내가 다른 세상에 들어왔음을 느끼게 되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불일암은 법정스님이 10여년 전까지 계시면서 ‘無所有’, ‘山房閑談’등의 맑고 향기로운 글들을 쓰셨던 곳이다. 그분의 글만큼이나 불일암도 너무 아름다워서 지금은 법정스님이 그 곳에 안계시지만 스님의 자취가 여전히 느껴지는 곳이다. 불일암이 알려지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아지면서 법정스님은 ‘버리고 떠나기’라는 글과 함께 홀연히 불일암을 떠나 주소도 없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강원도 산골짜기의 화전민이 쓰다 버린 오두막에서 홀로 정진하고 계신다. 그 후에는 법정스님의 상자 분들이 돌아가면서 불일암을 지키고 있다.

우연히 불일암을 알게 된 나는 불일암에 서측에 조금 떨어져 새로이 암자를 증축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마 사람들이 자주 찾아와서 따로 정진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하셨는가 보다. 나도 신분이 건축과 관련 된데다 딱히 다른 일로 바쁘지 않은 백수인지라 막연히 집 짓는 것 구경도 할 겸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그 곳을 찾게 되었다.

갔더니 생각보다 공사는 생각보다 많이 진척되어 있었다. 3월부터 공사를 시작한 이래 경사진 땅을 오로지 사람의 힘, 즉 삽과 괭이로만 대지를 조성하여 집터를 만들고 그 위에 주춧돌을 세우고 기둥과 보를 엮어서 이미 상량까지 한 상태였다. 대들보에는 ‘夜有夢者不入, 口無舌者當入’이라는 상량문이 쓰여 있었고 이 집의 성격을 그대로 나타내는 듯했다.

스님께서 이 두칸 흙 집에 바라는 모습은 질박하고 단순한 수행자의 모습이여서 그에 따라 그 집에는 전기와 수도, 전화는 물론 여성의 출입을 금하는 집이 되기를 바라셨고 그렇게 지어지고 있었다.

집의 재료로는 우리의 도시를 이루고 있는 콘크리트, 아스팔트, 철, 알루미늄, 유리 등은 없고, 오직 나무와 흙과 짚과 돌과 물이며 인공적인 재료는 단지 방수를 위해 지붕에 깐 시트일 뿐이다.

작업을 위한 조건들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공사에 참여하는 인원이라고는 상자스님 한분, 목수 한분, 행자 한분, 이렇게 모두 세 명이었고, 그분들 중  전에 집을 지어봤다거나 하는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상자스님이 출가하시기 전에 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막 노동일을 해보신 경험에 스스로 공부하신 것을 바탕으로 집을 짓고 계셨다. 그 곳까지는 자동차나 다른 어떤 수송수단도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나무와 흙 등은 현장에서 바로 구해서 사용하고, 각재, 판재, 돌 등 산 속에서 구할 수 없거나 돈을 주고 구입한 재료들은 지게로 산 밑에서 현장까지 운반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경사진 땅을 깎아 대지를 만드는데 한 달반 동안 세분이서 곡괭이질과 삽질만 하셨다 하고, 주춧돌로 사용할만한 돌을 부근에서 발견하여 황소를 이용해 대지로 20여 미터가량을 옮기는 데만 이틀이 걸렸다고 한다. 과중한 노동(?)에 그분들은 얼굴 살이 많이 빠지신 모습이셨다. 막 노동일을 하는 사람들은 짬짬이 담배도 피우고 새참도 먹으면서 쉬어가면서 일을 하는데 그분들은 세끼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묵묵히 쉬지 않고 일하고 계셨다.

단지 2주동안이나마 나는 흙과 물과 짚을 섞어 흙벽을 만들고 나무조각들을 지게로 지어 옮겨 지붕을 이으면서 그 작업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툴던 지게질, 삽질, 망치질이 조금씩 익숙해지고 쉬이 피곤하던 몸도 풀려갈 즈음 점점 집의 모습이 구체화되어 가는 것에 어느덧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자기가 살 집을 직접 지어 살았던 우리네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이렇게 집을 지었을 텐데, 콘크리트와 철만으로 지어진 집을 경험해온 나로서는 나무와 흙으로만 짓는 우리네 집을 이렇게 처음 경험하게 된 것이다.

우리네들이 집을 지을 때 무슨 허가나 민원도 없었을 것이다. 공기나 공사비의 압박도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 집을 지음으로 해서 특별히 많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당연히 아니었을 것이다. 호화로운 치장을 통해 무슨 과시를 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가족과 후손들이 오순도순 살고 농사일을 할 공간을 만든다는 즐거움으로 집을 지으셨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들이 집을 짓는 것은 특별한 이벤트나 사업이 아닌 삶 그 자체였기 때문에 누구에게 맡기거나 특별한 재료를 구해 집을 지을 필요없이 직접 농사일 중간중간 품앗이로 집을 짓고 보수하고 지붕을 잇고 하였을 것이다.

불일암에 짓고 있는 그 집은 아름다운 집이다. 그 집이 아름다운 이유는 거창하기 때문도 아니고 호화로운 치장을 해서도 아니며 편리한 시설들을 갖춰서도 아니다. 그저 평범하고 작은 두 칸짜리 흙집일 뿐이다. 그러나 편리한 문명의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네들 입장에서 오히려 불편하고 어리석은 그 집은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지어지는 과정에서부터 수도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자락을 담으로 삼고 골짜기의 숲을 마당으로 하여 구름과 바람, 해와 달을 방안 깊숙이까지 불러들이는 집. 산토끼와 나비와 새가 가금 손님으로 찾아오는 집. 이미 그 집은 아름다운 집일 수밖에 없다.

나는 이른바 흙 건축을 주장하는 사람도 아니며 오히려 철과 유리로 지어지는 현대적인 건축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기술과 재료는 새로운 건축과 공간을 만들어낸다고 믿으며 근대건축이 현대의 도시와 문화 그리고 사람들에게 끼친 긍정적인 효과를 적극 옹호한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하는 건축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작은 암자에서의 2주 동안은 쾌적성과 안락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너무 많이 갖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잃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생각하게 된 기회였다. 집은 우리의 삶을 담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얻은 것들이 있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도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공간은 잠깐의 스쳐가는 시간일지 모른다.

집의 본래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또한 산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개미, 달팽이, 지렁이, 두꺼비, 거미, 모기, 나비, 새 등 어렸을 적에 자주 보아왔지만 이제는 보기 어려워진 살아있는 자연, 밤이면 살포시 꽃망울을 피우는 달맞이꽃, 변화무쌍한 구름, 나뭇잎 사이로 살짝 걸친 달, 늦은 밤에 스님과 하던 귀신 이야기, 그리고 일하던 중간에 잠깐 다녀온 다도해 한 섬의 암자 여행은 이번 여름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끝으로 법정스님이 어느 글에서 인용한 면앙정 송순의 시로 이글을 맺고자 한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삼간 지어내니

나 한간 달 한간에 청풍 한간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라.


불일암 서전 공사중 사진

눈 내린 불일암

 

아름답고 쾌적한 집을 위해


집은 주인을 닮는다고 한다. 현관에 놓인 신발들만 보더라도 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도 하는데, 집안 곳곳에 깃든 몇 평 공간의 삶은 그 주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리라. 또한 집은 생활하고, 휴식하고, 작업하는 삶을 담는 그릇으로서 오히려 거주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같은 집, 동일한 환경에서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낸 부부가 서로 닮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집이 내 몸에 딱 맞는 편한 옷처럼 생활하는데 불편함이 없다면야 좋겠지만, 대부분 우리는 사소한 불편함을 그냥 안고 산다. 그 불편함이 그런대로 참을만해서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문제가 된다. 특히 장애인들의 경우 이러한 불편함의 정도가 심하고 이로 인해 당사자는 물론 가족까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은 수선해야 입을 수 있듯이 그러한 집은 뜯어 고쳐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만만치 않은 노력과 비용이다.

이러한 비용을 서울시에서 지원하여 몇 개 가구를 대상으로 진행된 작년의 중증장애인 주택개조사업에 자원봉사를 하게 된 내가 얻은 경험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건축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편의시설에 대해서는 거의 무지에 가까웠다. 단지 편의시설이라는 것은 법규책 속에서 경우에 따라 준수해야 할 규정에 불과했고, 장애로 인해 겪는 불편에 대해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빠듯한 조건 속에서 설계를 하다가 휠체어 경사로나 장애인용 화장실의 설치 때문에 공간이 낭비된다고 탓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한 내가 우연한 기회에 주택개조사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경험은 나에게는 반성과 함께 소중한 학습의 기회였다.

내가 가장 크게 배운 것 중 하나는 단지 물리적 환경의 개조로만 바라보았던 초반의 생각이 여지없이 깨지게 된 것이다. 사실 계단, 문턱, 화장실, 부엌 등의 물리적 환경의 개조는 비용의 문제를 제외한다면 이미 예상되던 일반적인 문제였다. 오히려 출입 및 이동, 식사, 목욕 및 용변, 휴식, 작업 또는 학습, 가족끼리의 의사소통 등 생활 자체와 관련된 문제가 오히려 중요한 문제이며, 이는 일반적이고 단순한 물리적 개조만으로는 다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각 가구마다 집의 방식, 장애유형, 생활방식 등 각기 다른 요구사항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함께한 자원봉사자들은 몇 번의 현장방문과 협의, 디자인 미팅을 걸치면서 일반적인 해결만이 아닌 각 가구별로 갖고 있던 생활에 대한 맞춤형 해결에 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뇌성마비인 아이를 어머니가 단열이 안 되는 욕실에서 목욕을 시키는 문제와, 혼자 있을 때 베란다에서 씻어야 했던 척추손상의 아주머니가 욕실에서 샤워를 할 수 있게 하는 문제는 같은 목욕의 문제였지만 전혀 다른 접근을 요구하였다.

또한 느낀 것 중 하나는 실제로 대부분의 가구들이 경제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는 했지만, 누적된 불편함에 지쳐 스스로 당장 가능한 작은 변화와 노력조차도 포기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개조사업은 단지 선택된 몇 가구 만에게 시혜를 주고 끝내는 사업은 아닐 것이다. 이번에 시도된 경험들이 공유되어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 시도들이 집에만 머물지 않고 도시공간 곳곳으로 확장되어 영향력을 미치길 바란다. 아름답고 쾌적한 공간을 장애인이라고 해서, 가족에 장애인이 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집을 꾸미는 당사자는 바로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택개조 당시 문제점과 해결책을 당사자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어쩌면 우리 자원봉사자들은 그것을 대행하였던 것일 뿐이었다.

집을 짓는 행위, 우리 삶의 공간을 꾸미는 행위는 단지 건축의 절차와 전문적 지식활용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결국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인간과 삶에 대한 이해와 애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도둑질만 빼놓고 다 해봐라 ?”


무엇이든지 원하면 다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던 대학 신입생 시절의 일이다. 의례 그렇듯이 건축과 선배들은 우리 신입생들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해주었고, 아직 낯을 익히지 못한 우리들은 새로이 다가올 환경에 기대 반, 설렘 반으로 함께하고 있었다. 서너 잔 소주잔들이 오가고 분위기가 익어갈 무렵, 얼굴도 이름도 기억할 수는 없지만 한 선배가 우리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향해 던진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도둑질만 빼놓고 다 해봐라”

주어진 테두리에 잘 순응하여 그럭저럭 대학 진입에 성공한 나는 이 말을 논리적 해석의 과정을 거치기도 전에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였고, 남에게 피해를 끼치거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만 않는다면 다양한 경험이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 주리라 생각하였다. 나는 대학 생활의 첫 목표를 이것으로 삼기로 했다.

그러나 대학생활은 생각만큼 녹녹치 않았다. 당시 80년대의 대학은 대부분 그러했겠지만, 꿈과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고, 다양성의 가치는 받아들여지지 못하였다. 결국 대학 생활은  최루탄 가스와 계속되는 수업거부 속에 아쉽게도 아무 것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끝맺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선배의 말은 건축가가 되기 위해 가져야할 생활방식과 생각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실제로 건축을 직업으로 삼으면서부터, 건축이 단지 건물이라고 하는 물질적인 껍데기를 만드는 행위만은 아니고, 결국 우리의 삶, 생활방식과 직접 관련맺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건축가는 한 가족의 집을 설계할 때, 그 가족 구성원들의 생활방식, 습관, 취향을 당연히 고려해야 한다. 만약 패션쇼장을 설계한다면, 패션쇼가 이루어지는 전 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패션쇼를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결코 패션쇼장을 설계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건축가는 관객으로서 뿐만 아니라 패션쇼를 개최하는 기획자나, 땀과 영혼이 깃든 작품을 발표하는 디자이너나, 패션쇼에 직접 참가하는 모델, 조명 및 음향 기사 등의 입장에서 고민하여 모두가 불편함이 없도록 계획하여야 한다. 어떤 선배 건축가가 러브호텔을 처음으로 설계하게 되었는데, 이른바 잘 되었다는 러브호텔들을 부인과 함께 순례하느라 본의 아니게(?) 금슬이 좋아졌다는 농담같은 일화도 있다.

따라서 좋은 건축가는 당연히 갖춰야할 건축적 전문지식뿐만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생활방식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장애인 편의시설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이는 건축전문가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건축교육의 과정에서도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해 다루어진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고, 나 자신도 건축설계의 과정에서 편의시설에 대해 중요하게 고려했던 적도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법에만 겨우 맞추어 장애인용 화장실이나 경사로를 설치하였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사용하는 데는 오히려 불편한 경우도 많고, 우리의 도시 환경은 장애인들에게 지뢰밭과 같은 곳이 되어 버렸다.

그런 면에서 5월에 편의연대가 기획한 “장애인편의시설 건축아카데미 : 건축, 삶, 가족”은 장애인에게나 건축인들에게나 그 출발 자체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행사이다. 건축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장애인들의 삶과 생활방식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고, 심지어 직접 장애를 체험하는 시간을 마련한다면, 장애인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이후 실제의 건축행위에서 소외되었던 장애인 편의시설이 당당한 자리를 찾게 되길 기대한다. 심지어 자기 집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는 장애인의 생활을 알게 된다면, 하다못해 문손잡이, 스위치, 문턱하나에도 좀 더 각별한 고민을 담게 될 것이다. 그동안 가려지고 소외되었던 장애인의 삶과 생활이 당당히 양지로 나온다면, 무지몽매한 우리 건축쟁이들을 깨우칠 뿐만 아니라, 그만큼 우리사회는 장애인과 함께 어울려 일하고, 배우고, 즐길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오는 날, 짧은 생각


하루, 이틀 해가 보이나 했더니 다시 어김없이 비가 온다. 올 여름, 지긋지긋한 비의 나날이었다. 이 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휴가를 다녀온 친구는 비 때문에 제대로 해수욕도 못했다고 투덜대지만, 휴가를 가지 못한 나는 속내로 샘통이라고 하며 그나마 덜 더워서 에어컨 전기값을 아꼈다고 뿌듯해한다.

사실 건축하는 사람에게 비는 썩 반갑지가 않다. 자다가도 굵은 빗소리에 깨어나 혹시 새로 지은 집에 비가 새지나 않을까, 지금 공사하는 현장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잠 못 드는 경우도 많다. 아직 홍수가 날 정도로 많은 비가 내리지는 않아서 다행이지만 그동안 비오는 날이 많아 공기는 지체되고 공사비용은 증가되어 걱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을 생각해보면 비가 오면 TV시청이나, 온라인 게임이라든지, 홈쇼핑과 같은 ‘방콕’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고 이런 분야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비는 고마운 손님일 것이다.

우산장수 아들과 부채장수 아들의 우화에서처럼 비에 대한 입장이 다르듯이, 우리들은 같은 상황이나 사물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반응이나 입장을 갖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종종 갈등이 발생한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이 제대로 조정되지 못했을 때이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경우는 이 조정되지 못한 갈등을 우위에 있거나 다수인 이른 바 주류가, 열세이거나 소수인 다른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대가로 해결하려는 때이다.

우리는 과거 도시 공간 속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수없이 해왔다. 개발, 경제성장, 효율, 고속이라는 명제는 철거, 무시, 소외, 금기라는 방법을 통해 소수자들을 구석으로 추방해왔다. 물론 우리의 도시 공간은 워낙 수많은 변수들과 관련되다 보니, 이 공간이 우리들의 삶의 질과 관계 맺는 과정에 대해 단순한 도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평의 작은 공간에서라도 강자, 주류만을 위한 공간에서 벗어나, 약하고 무시되던 소수가 당당히 자기 이야기를 할 때 무참히 철거되고 무시당했던 아름다운 동반의 공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네온싸인이 어우러진 휘황찬란한 거리에 한껏 멋을 부린 젊은이들의 활기찬 미소가 있고, 자동차로 붐비는 높은 빌딩숲 사이로는 회사원들이 바쁘게 오가고, 작은 놀이터에 아이들이  재잘재잘 놀고 있고, 동네 아주머니들은 아름드리 나무 그늘에서 정담을 나누고 있고, .... 이러한 우리 일상의 아름다운 삶과 풍경은 배제, 무시, 소외라는 일방적이고 무시무시한 단어와는 전혀 관련 없다. 오히려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 끊임없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과 더욱 관련있지 않을까?

우산장수 아들과 부채장수 아들을 둔 어머니는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하였다. 먼저 이웃의 충고로 마음가짐을 바꾸었다. 이 두 아들의 어머니는 처음에는 비가 오면 부채장수 아들을, 맑으면 우산장수의 아들을 걱정했지만, 마음가짐을 바꿔 비가 오면 우산장수 아들이 장사가 잘 되고, 맑으면 부채장수 아들이 장사가 잘되니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다른 이웃의 충고로 두 형제가 합심하여 비오는 날에는 우산장사를 하고 맑은 날에는 부채장사를 하여서 일손도 덜 바쁘고 더 잘살게 되었다한다. 만약 일년 중에 비 오는 날보다 맑은 날이 많다고 해서 우산장사를 아예 하지 않는다면, 부채만을 팔아서 두 형제가 먹고 살아야 한다.

다수가 소수를 희생시켜 그 위에 군림하는 부조리는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수는 소수가 있기 때문에 다수이다. 강자, 주류는 약자, 비주류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면,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갈 수 있다면 두 아들의 어머니 우화처럼 해피엔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장실부터 다시 그리기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을 갓 시작하는 신입사원은 대부분 화장실을 그리는 것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한다. 처음 그려보는 도면인 만큼 벽 내부의 타일숫자까지 확인하며 열심히 그리지만, 선배나 소장의 빨간 펜에 의해 떡칠이 되는 쓰라린 초보의 경험이 대부분의 건축설계의 실무자들에게 있다.

이렇듯 화장실 도면부터 실무를 시작하는 첫 번째 이유는 일단 도면을 그리는 일반적인 규칙과 척도를 깨우치게 하기 위함이다. 다음의 중요한 이유는 화장실이라는 곳이 전체 건물의 작지만 독립된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이지만 용변을 보고, 손을 씻고, 화장을 고치는 다소 복합적인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고려하여야 하고, 설비, 전기등의 실무적인 문제에 대해 고민하여야 하기에 화장실은 신입사원을 훈련시키기 위한 좋은 소재이다. 나도 그렇게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화장실을 잘 계획하는 사람이 설계를 잘 한다고 직원들에게 강조하곤 해왔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화장실을 덜 중요하게 여겨왔던 것도 사실이다. 당시 화장실은 ‘볼일보는 곳’이상의 수준이 아니었으며, 화장실의 계획은 마감에 쫓겨 가장 숙련되지 못한 사람에게 팽개쳐진 ‘구색 맞추기 위한 도면’에 불과한 경우도 많았다. 점차 나의 일에서 화장실은 별로 중요한 것이 되지 못했고, 최소한의 법규조건을 충족시키는 거추장스러운 업무가 되었다.

이렇게 화장실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던 최근 몇 년 동안, 화장실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문화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욕구해소만을 위한, 부끄러워 드러내놓고 말하기 민망한 가리워진 화장실은 이제 주위의 간섭, 시선, 소음으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 자신을 되돌아보는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꾸는 공간이 되었다. 상당수의 고속도로 휴게소나 공공장소의 화장실은 꽃과 향기와 음악이 어우러진 쾌적하고 상쾌한 공간이 되었다. 이렇듯 우리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은 화장실을 문화공간, 생활공간으로 격상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장실의 ‘예술성’보다 더욱 중요한 원칙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질’의 문제이다. 예쁜 화장실도 중요하지만 모두에게 편한 화장실 또한 중요하다.

일본여행 중 우연히 들른 화장실 전문 설비 회사의 전시장은 화장실에 대한 나의 관점을 발전시켜준 소중한 곳이었다. 이른바 화장실 문화의 선진국답게 갖가지 화장실 설비와 비품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노약자나 신체활동이 불편한 사람을 위한 설비에 대한 전시에 상당한 공간들을 할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체 전시공간의 반 이상을 이러한 설비에 할애하고 있었다. 또한 백과사전처럼 꾸며진 제품 설명서에는 상세한 분류표와 전문적인 지침들이 제시되고 있었는데, 각 설비마다 전동휠체어, 수동휠체어, 임산부, 유아, 노인(지팡이 사용자), 보호자동반유무, 인공방광 및 인공항문 사용자, 심지어는 왼손잡이 등의 사용가능 여부를 범례와 함께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또한 전문가를 위한 설계지침들도 꼼꼼하게 제시하고 있었다. 화장실 설계 지침서와 같은 온갖 제품설명서를 가득 챙기면서 뿌듯함을 느꼈지만. 몇 년 전 장애인 주택개조를 경험하면서 우리의 대형 가구회사 중 휠체어 사용자를 위한 부엌가구를 생산하는 회사가 없었던 씁쓸한 기억으로 전시장을 나와야 했다.

우리도 노인인구가 많아지고 이와 관련된 제품 수요도 많아져서 전문적인 시장이 형성될 것이다. 그에 따른 연구와 자료들도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당장 현실에서 나와 같이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 화장실에 대한 연구와 고민을 이제 슬슬 시작하여야 한다. 좋은 건물이나 장소는 훌륭한 화장실을 가지고 있다. 좋은 건물에는 보기 좋을 뿐만 아니라 쓰기에도 편안한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을 잘 계획하는 사람이 좋은 건물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설계도면에서 화장실을 꼼꼼하게 들여 보아야 겠다.

 

 

건축을 경험하기

 

당신의 건축지수는?

이제 당신의 건축지수를 측정하고자 합니다. 질문에 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측정방법은 간단합니다. 예는 1점, 아니오는 0점이며, 초급질문에는 곱하기 3, 중급질문에는 곱하기 2, 고급질문에는 곱하기 1을 하여 합산하시면 됩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초급질문입니다.

  1.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꿈꾸어 본 적이 있다.

   2. 내가 사는 도시에 좋아하는 장소가 있다.

   3. 마음에 드는 건물이 있다.

   4. 싫어하는 건물이 있으며, 구체적으로 그 이유를 댈 수 있다.

   5. 불편한 생활환경을 개선해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6.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문제점 중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있다.

   7. 건축가와 시공자의 하는 역할을 분별할 수 있다.

그럼 간단히 몸을 풀었다면 중급으로 넘어가 볼까요.

   8. 내가 살고 싶은 집을 직접 그려본 적이 있다.

   9. 이름을 댈 수 있는 우리나라 건축가가 있다. (TV의 오락프로에 나오는 사람 빼고)

   10. 건축 잡지를 사 본적이 있다.

   11. 영화의 장면 중 인상에 남는 세트나 배경화면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12. 전통 한옥에서 자본 적이 있다.

고급문제입니다. 

   13. 다음의 외국의 건축가 중 들어본 이름이 있다.

       Le Corbusier, Mies van der Rohe, Louis Kahn, Alvar Aalto

   14. 부석사, 병산서원, 소쇄원, 연경당 중 가 본 곳이 있다.

   15. 로마네스크, 르네상스, 고딕, 바로크의 양식을 구별할 수 있다.

   16. 메트로폴리스, 마천루, 블레이드러너, 스페이스오디세이2001 중 본 영화가 있다.

고급문제는 다소 어렵지만 너무 낙담하지 마십시오. 사실 저도 건축을 하기 전에는 아니요라고 대답했을 만한 항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안위할 수만은 없습니다. Le Corbusier라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건축가는 미국의 유력 언론에서 세기말에 선정한 20세기를 이끈 위대한 예술가 10인에 피카소 등과 함께 선정된 사람입니다. 당신이 20세기의 10대 예술가를 모르다니 약간 당혹스러운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Less is More"라는 명언을 혹시 들어보셨다면 그 말의 주인공이 Mies van der Rohe라는 건축가라는 것을 당신의 상식사전에 올리시길 바랍니다. 혹시 당신이 유럽 사람과 핀란드의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안다고 말한다면 Alvar Aalto라는 건축가도 아느냐는 질문을 받을 가능성이 큽니다.

물론 위의 질문들은 글쓴이가 임의로 작성한 질문이니 측정값의 신뢰도가 공인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초급질문은 우리를 둘러싼 도시와 환경에 대한 애정과 관심에 대한 척도입니다. 중급은 그 관심이 구체적인 행위와 관련되었는지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고급질문의 항목은 그러한 관심이 학습으로까지 발전된 단계입니다.  자, 그럼 이제 평가를 하자면, 당신의 점수가 30점을 넘는다면 당신은 분명히 건축과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당신은 뛰어난 건축적 식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점을 넘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살고 있는 도시와 환경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점수를 넘지 못하는 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관심과 노력을 부탁드린다는 표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경험의 방식

그럼 건축과 익숙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대부분의 경험이 마찬가지이겠지만 건축을 경험하는 방식은 크게 3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대부분의 경험은 실제 몸으로 겪는 것(physical experience)으로부터 발생합니다. 이 몸의 경험은 가장 강하고 원초적입니다. 특히 건축은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는 경험이라기보다는 직접 안과 바깥에서 생활하면서 시각, 촉각, 후각 등의 오감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경험을 하더라도 사람마다 반응은 다르기 마련인데 이는 경험에 감정적 측면(emotional experience)이 작용하게 때문이다. 같은 장소에 가더라도 그때의 심리적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다른 느낌을 주게 되는데, 예로 사랑하는 애인과 함께 찾았던 장소를 헤어진 후 홀로 가게 된다면 그 곳에서 느끼는 감정은 아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지적경험(intellectual experience)입니다. 어떤 사물이나 장소를 경험할 때 그것에 대한 지식은 그 경험을 훨씬 풍부하게 해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 배낭에 챙겨 넣는 그곳에 대한 가이드북이나 여행기들은 그 여행을 더욱 만끽하게 하는 소중한 지침서가 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 상황에 적절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고호의 밀밭의 까마귀를 보고 붓의 자취나 색감들에 감동을 받기도 하겠지만, 이 그림이 고호가 자살하기 전에 그림 마지막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 그림을 다시 한번 살펴보게 되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세 가지의 경험방식은 따로따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건축에 대해 무지한 사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 자꾸 알고 싶어집니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배려와 관심을 통해 표현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 사람이 훨씬 건강하고 아름다운 삶을 꾸려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가 건강하고 아름다운지 의문스럽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환경에 대해 관심과 사랑을 기울였는지 궁금합니다. 거리를 도배질하고 있는 엄청난 양의 광고판은 우리를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도시를 지배하는 자본과 정치의 힘은 우리 삶의 역사와 가치, 그리고 미래를 무시하고 있습니다. 소수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도시공간 곳곳에는 지뢰와 같이 위험한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들 둘러싼 환경에서의 꿈과 낭만은 돈이 없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새로 지어진 역사적인 건물에 관한 기사에는 시공회사의 이름만 나와 있지, 일을 총괄하고 밤낮으로 동분서주 했을 위대한 건축가에 관한 설명은 한 줄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너무나 소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이 삶의 환경은 싫어졌다고 버리거나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식들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자식들이 살아갈 훌륭한 환경을 남겨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만의 이기주의와 무지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더렵혀지고 치유하기 힘든 환경을 물려준다면 지구의 역사 중 우리가 살았던 시기가 가장 병들었던 시기로 기억될 지도 모릅니다. 병들기 전에 예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건강이 병들었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회복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정성을 다해서 치료해야 할 것입니다. 그 관심과 정성은 결국 그 사람의 건강을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도시와 환경은 우리의 작은 관심과 정성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사랑을 받기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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